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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 일제는 민족 동화 정책을 기초로 해서 한국을 식민 지배하였다. 1910년대 일제는 헌병 경찰 제도를 통한 억압적인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또한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과 회사령을 실시하여 조선의 경제와 농민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토지 조사 사업은 농민의 토지 소유를 폭압적으로 소멸시킴으로써 소작 조건을 악화시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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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달성군을 비롯해 전국의 학생들과 시민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주·민족 운동.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이승만 단일 체제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하여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관권의 개입이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대구는 대표적 야당 도시로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민주당의 선거 구호가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민주당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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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북한]이 발발한 전쟁에 대한 달성군의 상황.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이후 7월 14일 육군 본부가 대구로 이전하였고, 7월 16일 피난 정부도 대구로 후퇴하였다. 달성군은 8월 1일부터 구축된 낙동강 방어선에 힘입어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는 크게 입지 않았다. 특히 왜관-다부동 전투, 창녕-영산 전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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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중 일 전쟁 이후 달성군에서 조직된 관변 군사 후원 단체. 7군 연맹(七郡聯盟)은 일제가 1937년 중 일 전쟁 이후 전쟁 동원 정책을 펼치면서, 달성군 등 7개 부, 군에 군사 후원을 위해 만든 관변 단체이다. 중 일 전쟁 이후 일제는 달성을 비롯한 대구·안동·영일·경주·경산·김천·상주 등 7군을 대상으로 우선적으로 군사 후원을 지원하는 체계를 갖추고자 7군 연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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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전쟁론에 입각한 무장 항일 투쟁을 목표로 비밀 결사를 조직한 사건. 1928년 4월 하순부터 신간회 대구 지회의 노차용·장택원·정대종 등은 대구 시내 문상직의 하숙에서 만나 신간회나 근우회에서 야학이나 강연회 같은 수단으로 민족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직접적인 무력 투쟁 방략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비밀 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1928년 5월 18일에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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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0월 달성군 가창면에서 결성된 소작인 단체. 가창면 농업협동회는 1921년 10월 달성군 가창면에서 지이달(池二達), 서대수(徐大洙) 등을 중심으로 소작인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농민 단체로서 달성군의 농민 운동을 주도하였다. 가창면 농업협동회는 농민들의 단결, 지세 공과금 등 일체 세금은 소작인이 납부하지 않을 것, 최후까지 악지주에 대해 저항할 것, 회원의 부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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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6월 달성군 수성면 주민 300여 명이 가창면 순사주재소를 습격한 사건. 1922년 6월 수성면 주민이 가창면 소재의 초장(草場)에서 풀을 베다가 그곳을 지나가던 일본인 순사 야마모토[山本]로부터 민족을 비하하는 모욕적인 언사를 들은 것이 발단이 되었다. 수성면민이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 면민에게 초장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자 흥분한 면민 300여 명이 망치를 들고 곧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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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가창면에서 결성된 소작인 농민 운동 단체. 가창소작인조합(嘉昌小作人組合)은 1923년에 결성되었다. 가창면 농업 협동회를 계승하고 있는 농민 운동 단체이다. 1923년 지주 서우순에 대한 투쟁과 1925년 낙작인회 투쟁을 통해 농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달성군 가창면 소작인들의 권익 옹호와 신장을 목표로 결성되었다. 구체적으로 지세 등 일체 공과금 불납, 소작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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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의 대한민국 정치인. 강대휘(姜大徽)[1918∼?]는 1918년 경상북도 달성군 논공면 위천동[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위천리]에서 태어났다. 1941년 평양 기성 의학 강습소(箕城醫學講習所)에서 3년을 수료한 후, 1942년 조선 총독부 의사 시험에 합격하고 대구에서 내과 의원을 운영하였다. 6·25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2년 군대에 입대하여 약 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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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3월 대구 달성 지역에서 조직된 청년 지식인 문화 운동 단체. 강유원간친회(講遊園懇親會)는 1913년 3월 달성 친목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국내외 청년 지식층을 규합하여 조직되었으며, 문화·학술 활동을 중점적으로 전개함으로써 달성 친목회가 추구한 독립운동의 외연을 확대해 나갔다. 강유원간친회는 학술 강의, 체육 활동을 매개로 신지식 청년층의 활동 공간을 확보하는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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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강윤옥(姜潤玉)[?~?]은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지금의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15일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에 있는 대구부 소속 조선인 공동묘지 안 제사를 지내는 건물 창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수었다. 또 동일 장소의 공동묘지 북쪽 입구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만세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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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대구 달성 지역에 설치 되었던 소방 조직체. 1939년 7월 3일 「경방단 규칙」을 제정·공포하고 소방조와 수방단을 해체하여 경방단(警防團)으로 통합하였다. 경방단의 설립 목적은 1937년의 중 일 전쟁으로 인해 전시 체제에 들어가면서, 유사시에 방공(防空)의 완벽을 기하여 치안을 확보하려는 데 있었다. 도지사는 직권 또는 부, 읍, 면의 신청에 따라 경방단을 설치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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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6월 대구 지역에서 국민 보도 연맹 사건과 한국 전쟁 전후 양민 학살 사건의 경상북도 희생자 유가족들이 결성한 단체.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4·19 혁명으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사회 분위기에서 6·25 전쟁 전후 정부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의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 회복, 유가족에 대한 배보상 등을 목표로 결성되었다. 긴급한 주요 사업으로 위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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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일제가 달성군에서 농가 갱생 계획을 목표로 설립한 조합. 공려조합(共勵組合)은 일제가 전쟁 정책으로 인해 조선의 농촌이 더욱 피폐해지자 농가 갱생(農家更生) 계획을 목표로 설립한 조합이다. 공려조합은 부족 식량의 충실, 현금 수지의 균형, 부채의 정리 상환을 목표로 하여 농민 생활의 안정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명분이었고, 실제 목표는 ‘충실한 황국 신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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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학생 독립운동가. 곽수범(郭洙範)[1910~?]은 1928년 10월 서울휘문 고등 보통 학교 3학년 재학 중 동맹 휴학 사건으로 퇴학당했다. 그 뒤 1929년 4월 서울성봉 중등 학교 4학년에 다시 입학했으나 7월 자퇴했다. 1931년 6월 무렵 김일식(金一植)·염필수(廉弼守)·이경석(李璟錫)·김석구(金石九)·한순(韓錞)·이재우(李載雨)·김홍직(金洪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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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곽종해(郭鍾海)[1891~1946]는 1891년 2월 27일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현 현풍읍] 중동에서 태어났다. 1920년 8월 초순에 달성군 최초의 청년회인 현풍 청년회의 결성을 주도하고, 창립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현풍 청년회의 주요 활동은 노동 야학을 통한 교육 기관 설립이었다. 1920년 8월 10일 무렵 상해 임시 정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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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현 현풍읍]에서 전개된 관공리 대상 독립운동 권고 활동. 3·1 운동 이후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에 살고 있던 김달문은 일제의 한국 침략을 부당하다고 인식하며,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김달문은 1920년 10월 중 달성군 유가면 금동(琴洞)[현 유가읍 금리] 이상철로부터 독립운동이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조선인 관공리가 일본 제국주의의 손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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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달성군을 포함하여 우리 민족이 일제에 빼앗긴 주권을 회복한 역사적 사건. 1945년 8월 15일을 해방이라고도 한다. 광복은 내외적 발전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먼저, 내적으로는 한말(韓末), 일제 강점기 국내외에서 다양한 이념과 방략(方略)에 따라 전개된 민족 독립운동의 지속적 전개에서 찾을 수 있다. 독립운동의 전환점을 만든 것은 전 민족적 항일 운동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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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1·4 후퇴 당시 국민 방위군 간부들이 군 예산을 횡령한 사건. 국민 방위군은 한국 전쟁 중 1950년 11월 중국 공산군이 참전하면서 전세가 급반전될 때, 이에 대비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1950년 12월 11일 국민 방위군 설치법을 공포하여 창설되었다. 이 법의 대상자를 ‘사병’ 혹은 ‘제2 국민병’이라고 불렀다. 그 대상은 만 17세 이상에서 40세 미만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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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좌익 인사의 전향 및 교화를 위해 조직된 반공 성격의 관변 단체. 보도 연맹은 1948년 12월 「국가 보안법」의 구체적 운용 대책에 따라 조직한 반공 관변 단체로서 정식 명칭은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다. 보도 연맹은 「국가 보안법」에 저촉되는 사람 중 좌익을 교화 전향시킬 목적으로 조직되었고, 구성원들은 좌익 전향자들이었다. 곧 남한의 단독 선거에 반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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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 설립된 소농을 대상으로 한 공제 조합. 권농공제조합(勸農共濟組合)은 일제가 소농(小農)의 생활을 개선하고 농촌을 발전시킨다는 명분으로 설치하였다. 주요 사업은 1928년부터 5년간 경상북도 내 전체 272면에 1면당 4개 조합씩 전체 1,088개 조합을 설치하고, 경상북도 지역 소농 3만 2640명에게 1인당 평균 20원 상당의 소액을 생업 자금으로 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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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유림 독립운동가. 권상문(權相文)[1850∼1931]은 1850년 12월 7일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내천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전민족적인 3·1 운동이 일어나 전국을 강타하고 있을 때, 경상북도 성주 유림 김창숙(金昌淑) 등의 유림계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의하였다. 독립 청원서 작성에는 곽종석(郭鍾錫)·장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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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친일 관료. 권중식(權重植)[1892~1943]의 일본식 이름은 야마모토 시게오[山本重夫] 또는 산본승우(山本昇佑)이다. 권중식은 1892년 경상북도 달성군 성북면[현 대구광역시 북구]에서 태어났다. 1913년 11월 문관 보통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15년 4월 조선 총독부 군 서기에 임용되어 경상북도 고령군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1921년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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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청학(權淸學)[1899~?]은 1919년 달성군 공산면 도학동에 있는 동화사(桐華寺) 부속의 지방 학림(地方學林) 학생으로 있었다. 윤학조(尹學祚)와 함께 김문옥(金文玉)에게 만세 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3월 28일 동화사의 심검당(尋劍堂)에 모여 만세 독립운동에 관해 논의한 결과 1919년 3월 30일을 의거일로 정했다.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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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말도(金末度)[1924~1969]는 1941년 6월 일본 교토[京都]의 시마무라 토공[島村土工]에 노동자로 취업하였다. 시마무라 토공에서 일하고 있던 중에 궁진(宮津) 중학을 졸업한 전경원(全京元)과 함께 조선인의 참된 자유, 행복은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밖에 없다고 믿고 독립운동을 펼칠 것을 결의하였다. 전경원과 함께 동지 규합에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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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설화리에서 태어난 김석주(金錫柱)[1898~1922]는 1920년 7월 30일 무렵 대구부 전정(前町) 금구(金龜) 여관에서 지내던 김한수(金漢洙)의 방에서 장내주(張來周)를 만났다. 여기에서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이를 중국상해 임시 정부 등 각 단체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독립운동 결사대(獨立運動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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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은수(金恩壽)[1896~953]는 1920년 10월 동향의 김달문(金達文)으로부터 독립운동이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조선인 관공리가 일제의 손발이 되어 그 운동을 정탐·밀고하는 데 원인이 있으므로 그들을 협박해서 사직하게 하고, 일제 통치에 장애가 되게 하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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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활동한 친일 관료. 아버지는 김종윤(金鍾潤)이며, 부인은 한정순이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김재환(金在煥)[1884~1950]은 1884년 6월 3일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에서 태어났다. 1907년 일본오사카[大阪] 부립 시노노메[東雲學校]를 졸업하고, 1907년 9월 대한 제국탁지부(度支部) 서기 판임관(判任官)에 임명되었다. 이어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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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점학(金点學)[1906~?]은 1906년 10월 6일 경상북도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간경리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조선 청년 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7년 민족 운동의 노선이 민족 협동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자 귀국하였다. 대구 고등 보통 학교 학생들의 비밀 결사인 사회 과학 연구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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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의 관료.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서봉(西奉)이다. 김치열(金致烈)[1921~2009]은 1921년 9월 경상북도 달성군[현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1943년 일본주오 대학[中央大學]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3년 고문 문관 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1945년 4월 일본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도쿄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설하였다. 김치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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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의 정치인. 김판석(金判石)[1919~1997]은 1919년 9월 경상북도 달성군[현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1938년 대구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49년 대한 청년단 영일군·포항시단 부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대한 청년단 소속으로 영일·포항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1년 제2대 국회에서 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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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나병 환자 치료를 위하여 설립되었던 전문 병원. 나병원(癩病院)은 1913년 3월 미국 장로교가 세운 제중원에서 영국인 의사들이 근무하는 동안 나병[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13년 3월 창립하였고 1913년 12월 달성군 달서면 내당동[현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에 신축 이전되어 운영되었다. 1913년 같은 해 일본 건국 기념일인 기원절에 일본궁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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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경상북도 달성군 각 면의 소작인들이 일으킨 소작권 반환 운동. 일제 강점기 농민 운동은 1910년대 토지 조사 사업과 1920년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한 일제의 농업책의 결과로 나타난 식민지 지주제의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달성군에서는 가창면 농업 협동회를 필두로 1925년에 이르기까지 각 면 소작인 조합이 결성되면서 지세 불납 투쟁과 소작지 반환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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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미군정이 설치한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의 경상북도 및 대구, 달성, 경산, 고령 지역 입법 의원.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은 1946년 미군정이 군정 법령 제118호에 따라 설치한 입법 기관이다. 1946년 미군정은 군정이 존속하는 동안 한국인들로 하여금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을 구성하게 하고, 여기에서 정치·행정·경제·사회 개혁의 기초가 될 법령 및 정책안을 작성하여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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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논공면에서 결성된 소작인 농민 운동 단체. 논공소작조합은 1923년 내지 1924년에 결성되어 1924년 소작권 반환 투쟁, 1925년 낙작인회 투쟁을 통해 농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달성군 논공면 소작인들의 권익 옹호와 신장을 목표로 결성되었다. 구체적으로 지세 등 일체 공과금 불납, 소작료 반분, 소작료 운반 왕복 30리, 무상 노동 불응 등이 목표였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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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농민이 권익 옹호를 위해 조직적으로 전개한 사회 경제 운동. 일제 강점기 농민 운동은 1910년대 토지 조사 사업과 1920년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한 일제의 농업 정책의 결과로 나타난 식민지 지주제의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달성군의 농민 운동은 1921년 10월에 가창면의 지이달(池二達), 서대수(徐大洙) 등이 가창면 농업 협동회를 조직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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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경 대구 달성 지역에서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목적으로 조직된 사회 운동 단체. 1925년경 달성군에서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을 목적으로 조선 형평사 달성 분사가 설립되었으며, 부사장에는 이학술, 총무는 손사준이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법적으로 철폐되었으나 사회 관습으로는 신분 차별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1923년 4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차별적인 봉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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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서 피폐된 농촌 개선을 명목으로 실시된 일제의 농업 정책. 농촌진흥운동은 1930년대 일제의 조선 지배와 세계 대공황으로 피폐된 조선 농촌을 개선시킨다는 명목으로 실시된 일제의 농업 정책이다. 1930년대 일제는 식민지 농업 정책과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몰락하는 조선 농촌을 개선하려는 차원에서 농촌 진흥 사업을 전개하였다. 농촌진흥운동은 농업 공황을 수반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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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6월 총독부의 종용에 따라 총후 봉사 활동을 내세우며 조직된 친일 전시 동원 선전 조직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달성군 연맹. 일본은 중 일 전쟁 이후 전쟁 동원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 동원과 협력을 능동적으로 강제할 조직의 필요성에 따라 1938년 6월 중순경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조직하였다. 이 운동의 추진 목적은 “황국이 영원히 융창할 기초를 공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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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 설립된 사립 학교. 1929년 기준 달성군 내 수학 대상 인구 가운데 실제 교육 기회를 얻은 아동은 전체 지원자 769명 중 618명, 곧 80%였고 나머지 20%는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이는 일제의 지배하에 조선인의 교육 기회가 평등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당시 달성군 인구에서 입학 지원자 수가 아니라 입학해야 할 대상자를 기준으로 그 규모를 파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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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달성군에 설립되었던 좌익 농민 운동 단체. 달성군 농민조합은 1945년 12월 전국 농민 조합 총연맹 결성에 앞서 결성된 것으로 보인다. 달성군 농민조합이 결정되기 전인 1945년 10월에는 대구 지역과 함께 대구 달성 연합 농민 조합 협의회가 결성되어 있었다. 달성군 농민 조합은 농촌 지역인 달성군의 농민 문제, 곧 소작료와 토지 문제 해결 그리고 이를 위한 정치 활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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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 설립된 보통학교. 일제의 교육 방침은 1911년에 공포된 「조선 교육령」에 잘 나타나 있다. 핵심 내용은 이른바 충량(忠良)한 제국 신민(臣民)과 그들의 부림을 잘 받는 실용적인 근로인·하급관리·사무원 양성하는 것이다. 또 보통학교는 "보통의 지식·기능을 부여하고 특히 국민된 성격을 함양하며, 국어[日語]를 보급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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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발생한 양민 학살 사건. 한국 전쟁 중 남한 지역에서 진행된 양민 학살은 국군 및 미군, 인민군 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남한에 의한 양민 학살은 인민군이 점령하였던 지역, 빨치산 근거지 일대, 전쟁 직후 비점령 지역 등에서 최소한의 법적인 심리를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또 1949년 6월 5일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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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직후 달성군에서 조직된 민간 자치 기구. 광복 직후 결성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가 1945년 9월 6일 조선 인민 공화국으로 개편됨에 따라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달성군 위원회도 같은 해 10월에서 12월 사이에 달성군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고, 인민 위원장에는 김선기가 선정되었다. 대구의 북성로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하였다. 달성군 인민위원회의 지역에 대한 통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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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대구 달성 지역에서 조직되어 활동한 청년 운동 단체. 달성군 청년연맹의 결성은 조선 청년 총동맹의 조직 방침을 적극 수용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대구 지역과의 연대를 통해 활동하였다. 달성군 청년연맹의 목적은 강령에서와 같이, ‘연맹원의 호상 친목과 실력 향상을 기함, 호상 부조의 단결 및 통일을 기함, 호상 부조의 사회적 봉사를 기함’ 등이었다. 192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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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 성서면, 유가면[현 유가읍] 주민들이 식민 지배 당국을 대상으로 한 자치 요구 투쟁. 일제 강점기 식민 권력은 조선에 일방적인 식민 지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군민들은 경제적 이해나 면장 임명 등에 있어 자신들의 요구를 제기하여 지방 통치에 영향을 미쳤다. 1925년 달성군 구지면 소작인들은 경상남도 창녕군 대합면과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에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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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전후 달성군에서 자행된 양민 학살 현장에 대해 조사·발굴한 사건. 한국 전쟁 전후 달성군에서 자행된 양민 학살은 사형 선고라는 법적인 근거 없이 국가 권력에 의해 자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법치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 따라 양민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은 반드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1960년 국회 특별 조사반이 진행한 달성군의 양민 학살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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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달성군에서 발생한 노동자·시민의 파업 사건. 1946년 9월 대구·달성 지역에서 식량 문제가 폭발 일로에 있을 때, 대구에도 총파업이 파급되었다. 당시 대구의 5개 신문사가 9월 25일부터 10월 3일까지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였으며, 9월 24일 전국 노동 조합 평의회[전평] 경상북도 위원회의 파업 지시에 따라 9월 30일부터 모든 공장들이 파업에 돌입하였다.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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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 안일암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조직된 달성친목회 결사 운동. 달성친목회는 1908년 대구에서 계몽운동 단체로 결성되었다가 한 일병합으로 활동이 중지된 것을 1913년에 독립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재건된 비밀결사였다. 대한광복회[대한광복단]와 함께 1910년대 국내 대표적 비밀결사이다. 1908년 달성친목회는 교육 운동을 중점적으로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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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 경상북도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 경비대 6연대의 좌익계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 국방 경비대 6연대는 1946년 2월 18일 대구에 창설되었다. 6연대는 4연대와 함께 군대 내 좌익 세력이 가장 깊게 뿌리내린 곳이었다.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단선 단정에 반대하는 제주 4·3 사건이 발생된 이래 같은 해 10월 여수 14연대가 4·3 사건 진압을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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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대구 달성 지역에서 설립되어 활동한 계몽 운동 단체. 1906년 대구에서는 대구 광학회(大邱廣學會)와 다른 별개의 계몽 운동 단체로서 대구 광문사(大邱廣文社)가 설립되어 교육 운동과 경제 운동을 전개하고, 국채 보상 운동을 발기하여 전국적인 경제적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구 광문사는 1906년 대구에서 대한 자강회에 영향을 받아 설립된 자생 계몽 운동 단체로서 흥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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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8월 대구 달성 지역에서 설립되어 활동한 계몽 운동 단체. 1906년 8월 대구에서는 대구 광문사(大邱廣文社)와 다른 별개의 대구 광학회(大邱廣學會)가 설립되어 교육 운동을 중심으로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구 광학회는 민지 개발(民智開發)과 욕민 광학(欲民廣學)[교육 진흥 운동]. 식산흥업(殖産興業)을 통한 근대적 상공업의 발달을 목표로 하였다. 대구 광학회는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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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달성 군민이 참여한 대구 독립 만세운동. 일제는 민족 동화 정책을 기초로 해서 한국을 식민 지배하였다. 1910년대 일제는 헌병 경찰 제도를 통한 억압적인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또한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과 회사령을 실시하여 조선의 경제와 농민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토지 조사 사업은 농민의 토지 소유를 폭압적으로 소멸시킴으로써 소작 조건을 악화시키고, 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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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대구 달성 지역에서 활동한 노농 운동 단체. 1920년대 대구의 대표적 노농 운동 단체로서 달성군의 농민 운동을 조직화시켜 농민 운동을 지도하였고, 대구에서 직업별 노동 운동 단체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1920년대 달성군의 농민 운동을 조직화시키고, 직업별 노동 운동 단체의 설립을 주도하면서 전국적 본격적 노농 운동 단체의 창립을 목표로 하였다. 대구노동공제회는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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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대구와 달성 지역이 연합하여 결성한 최초의 농민 운동 단체. 해방 후 대구와 달성 연합으로 만들어진 농민 운동 단체로서 토지 문제, 농민의 사회 경제적 안정 등을 위해 활동하였다. 일제 강점기 토지 모순과 식민지 지주제의 모순을 혁파하고, 궁극적으로 토지 문제를 해결하며 당면 과제로는 소작료 개선을 통한 농민 생활의 안정을 목표로 하였다. 대구달성연합농민조합협의회는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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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길림 주재 군정사의 독립운동 자금 마련 운동. 일제의 한 일 병합 이후 독립 전쟁론에 입각한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이 중국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를 위한 독립운동 자금을 국내에서 조달하는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대한민국 길림 주재 군정사는 1918년 4월 무렵 김영순이 중국 길림성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유동열(柳東說)을 만나 조선 독립을 위해 청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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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에 따른 경상북도 달성군 지역의 정세 변동. 1948년 5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 선거로서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치러져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다. 달성의 5·10 선거 과정에서 단독 정부를 반대하는 시위가 전개되었고, 5·10 선거 이후에도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치러진 제헌 국회에서 달성군에서는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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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대구 달성 지역에서 설립되어 활동한 계몽 운동 단체. 대한협회 대구지회는 1907년 국채 보상 운동 이후 대구, 달성 지역의 계몽 운동 세력이 설립한 계몽 운동 단체로서 대구 광문사와 대구 광학회를 역사적으로 계승하면서 지역에서 교육 운동과 실업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협회 대구지회는 대구, 달성 지역에서 정치·교육·산업의 세 분야를 발전시키기 위해 설립되었다.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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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서 독립을 위하여 전개된 민족 운동. 한말 달성군은 근대 자주적 국민 건설 운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대구에서 펼쳐진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6년 대구 광문사(大邱廣文社)와 대구 광학회(大邱廣學會), 1907년 대동 광문회와 현풍군 단연 보상회(玄風郡斷煙報償會)를 통해 국채 보상 운동, 1908년 대한 협회 대구 지회 등을 통해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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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국주의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즈음인 1940년에 대구 사범 학교에서 조직된 항일 비밀 결사. 무우원(無憂園)은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민족의 낙원을 건설하고, 폭력적인 투쟁이 아닌 문화·경제적인 힘을 길러 독립을 달성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무우원이라는 이름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근심 걱정 없는 행복한 나라를 만들자는 뜻이자, 유태인처럼 경제의 힘을 길러 적을 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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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달성군 출신의 의병장. 본관은 남평(南平). 본명은 문봉각(文鳳珏)이다. 충선공 문익점(文益漸)의 20세손이며, 11대조 문세근(文世根)이 처음 달성으로 옮겨와 살았다. 9대조 문영남(文榮南)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동, 선략 장군 훈련 봉사(宣略將軍訓練奉事)의 직을 받았다. 아버지는 문하규(文夏奎)이고, 어머니는 경주 이씨(慶州李氏)다. 문석봉(文錫鳳)[1851~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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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장지(章之), 호는 수봉(壽峯). 문박(文樸)이라고도 불린다. 문영박(文永撲)[1880~1930]은 1880년 8월 3일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본리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서부터 1930년 사망할 때까지 13년 동안 전국 각지를 왕래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임시 정부에 군자금을 지속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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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4월 미군정 시기 달성군에서 결성된 좌익 성향 정치·사회단체의 연합 조직. 1946년 4월 미군정 시기 달성군에서는 민족주의민족전선 경북 위원회가 결성된 직후 민족주의민족전선 달성군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좌익 성향 정치·사회단체의 연합 조직으로서 성격을 가지나 민족주의 세력도 참여하고 있었다. 미소 공동 위원회에 대한 대응이라는 정치적 문제뿐만 아니라 당시의 긴급한 현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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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6월 달성군 현풍면[현 현풍읍]에서 설립된 좌익 성향의 청년 단체. 1946년 6월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에서 곽윤섭을 대표로 하여 150명으로 구성된 좌익 성향의 민주 청년단이 결성되었다. 민주청년단은 모스크바 삼상 결정안을 지지하며, 미소 공동 위원회의 원활한 개최 등 정치 문제에 초점을 두고 활동하였다. 민주청년단은 ‘민주 정당을 결성하자, 모스크바 삼상 결정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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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여성 독립운동가. 박수의(朴守義)[?~?]는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지금의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즈음 중국 푸우쑹[撫松縣]에서 조직된 지린성 군정서(軍政署) 부속 기관인 흥업단(興業團)에 전라남도 장성 출신의 이만준(李萬俊)과 이재술(李再述)을 통해 가입하였다. 박수의는 흥업단의 유일한 여성 단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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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호는 덕암(德巖). 박왕호(朴汪鎬)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박순호(朴純鎬)[1873~1934]는 1873년 1월 8일 경상북도 달성군 다사면 문양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전민족적인 3·1 운동이 일어나 전국을 강타하고 있을 때, 경상북도 성주의 유림 김창숙(金昌淑) 등의 유림계가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 평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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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계몽 운동가·관료. 박해령(朴海齡)[1857∼1920]은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에서 태어났다.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大邱廣文社)[달성 광문사] 문회가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기 위해 명칭을 대동 광문회(大東廣文會)로 바꿀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었다. 대동 광문회 회장을 비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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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달성군을 포함해 전국에 설치된 친일 반민족 행위 청산 특별 위원회. 제헌 국회에서는 일제 강점기 친일파의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역사적, 법적으로 청산하기 위하여 특별법 제정에 착수하여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1948년 9월 22일에 공포되었다. 이 법에 따라 친일파의 친일 반민족 행위를 조사할 특별 위원회로서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약칭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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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방명원(方明圓)[?~?]은 경상북도 달성군 달서면 내당동[지금의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는 서문 시장에서 만세 시위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뒤 4월 17일 비밀 결사 혜성단(慧星團)이 조직되었다. 다음날인 4월 18일 달성군 달서면 내당동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 혜성단의 김수길(金壽吉) 등이 찾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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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의 정치인이자 목회자. 배은희(裵恩希)[1888∼1981]는 1888년에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평양 신학 전문학교 재학 중에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1921년 전주 서문 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호남 지방 최초의 유치원인 전주 유치원을 설립하여 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민족 협동 전선 운동으로 전개된 신간회 전주 지회의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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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달성군에서 실시된 일제의 식민지 농업 정책. 제1차 세계 대전에 편승해 일본 자본주의가 급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도시에서 대규모 ‘쌀 소동’이 일어났다. 이에 조선 총독부는 일본의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서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였다. 산미 증식 계획은 지주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추진하면서, 일본의 부족한 식량을 조선에서 충당해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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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상무상(尙戊祥)[1908~?]은 1926년 6·10 만세 운동 이후 대구 고등 보통 학교 학생들이 사회 과학 서클을 결성하기 위한 움직임 끝에 사상 강좌회를 비밀리에 개최하였다. 이 사상 강좌회의 강사는 신간회 대구 지회 회원들이었다. 1927년 12월 사상 강좌회 학생들과 함께 마르크스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비밀 결사 신우 동맹(新友同盟)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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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서병룡(徐丙龍)[?~?]은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에서 태어나 20세까지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그 후 달성 학교에 2년간 수학하였다. 재산은 동산·부동산을 합해 시가 2,000원 정도였다. 1908년부터 대구 농공 은행(大邱農工銀行)의 행원으로 근무하면서, 1909년 달성 친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서상일(徐相日)·윤상태(尹相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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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달성군에서 활동한 친일 경제인. 서병주(徐炳柱)[1885~1956]의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1885년 10월 6일에 태어났다. 1913년 대구부에 도로 용지를 기부하여 조선 총독부로부터 목배 1개를 받았다. 1921년 조선 총독부의 매일 신보사가 주최한 내지 관광단[일본 관광단]에 참가하였다. 1924년 조양 무진 주식회사, 1937년 경북 상공 주식회사(慶北商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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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달성군에서 활동한 친일 경제인. 서병화(徐炳和)[1883~?]의 본관은 달성(達城), 일본식 이름은 달원장종(達原莊種)이다. 1883년 9월 대구부 동성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에서 태어났다. 1908년 대한 제국탁지부 임시 재원 조사국 양지과 대구 출장소 기수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한 일 병합 직후인 1910년 조선 총독부 임시 토지 조사국 대구 출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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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서보인(徐輔仁)[1895~1960]은 1895년 5월 6일 경상북도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에서 태어났다. 1930년 무렵 차경석(車京錫)이 교주로 있던 보천교(普天敎)에 입교하여 종교 활동을 펼쳤다. 1940년 2월 신인 동맹(神人同盟)이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독립운동 조직임을 알게 된 뒤 이에 가입하여 경상북도 문관(文官)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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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체육인.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문곡(文谷). 달성군의 대지주 서돈순(徐暾淳)의 4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서상천(徐相天)[1902~?]은 1919년 휘문 의숙(徽文義塾)을 다닌 뒤에 일본도쿄[東京] 물리 학교에 진학하여 1년간 수학한 다음, 1923년 일본도쿄 체조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직후 평안북도선천 중학교(宣川中學校), 1924년 휘문 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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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학생 독립운동가. 서오룡(徐五龍)[1911~?]은 1930년 12월 무렵 대구 상업 학교에 재학 중 사사키 다카시[佐佐木隆]·이동우(李東雨) 등과 함께 김동욱·권영달·김홍열 등을 만나 ‘프로 과학 연구소 조선 제1호 지국’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다. 구성원들은 일본 도쿄에 있는 프롤레타리아 과학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프롤레타리아 과학』을 이용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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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서장환(徐章煥)[1890~1970]은 1890년 10월 3일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설화리에서 태어났다. 서성준(徐聖濬)이라는 이명(異名)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노수덕(盧修德)·손군보(孫君輔) 등과 함께 비밀 결사 상의회(商議會)를 조직하여 의병 유족 후원 활동을 폈다. 그 뒤 1917년 9월 노수덕을 중국 만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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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달성 출신의 학자.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경양(景襄), 호는 임재(臨齋). 아버지는 서홍열(徐洪烈)이다. 서찬규(徐贊奎)[1825~1905]는 1846년(헌종 12)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수동재(守東齋)를 지어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 그 후 1883년(고종 20)에 경상도 관찰사 및 암행어사의 추천을 받아 의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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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송기찬(宋箕贊)은 일제 강점기에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910년대 후반 20살이 되기 전에 중국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중국 만주에서 몇 년을 보낸 뒤에 귀국길에 올랐다. 1920년 2월 국내로 돌아오는 길에 폭탄 습격을 기도한 불령선인(不逞鮮人)[불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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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예산(禮山). 호는 심연(心蓮). 송주석(宋柱錫)과 장수 황씨(長水黃氏) 사이 외아들로 태어났다. 송두환(宋斗煥)[1884∼1969]은 1910년 서울 보성 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보인다. 1912년 산직 장려계(産織獎勵契)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14년 신암동 뒤 반월산에서 정운해(鄭雲海)·최윤동(崔胤東)·최혁(崔赫)·엄주동(嚴柱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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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대해 달성군에서 일어난 반대운동.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 회의는 미소 군정이 실시되고 있는 한반도의 장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국제 회의였다.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완전한 독립을 기대하던 국내 정치 세력은 즉각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모스크바 삼상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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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농민 운동가. 양도일(楊道一)[1876~1942]은 1876년 6월 3일 경상북도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에서 태어났다. 1921년 10월 달성군 가창면에서 소작농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와 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가창면 농업 협동회를 결성하였다. 가창면 농업 협동회는 대동단결, 최후까지 악지주에게 대항할 것, 지세 공과금 등 일체 세금은 소작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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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전후 전국적으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을 조사하기 위하여 구성된 국회 특별 조사반. 4·19 혁명 이후 국회에서는 6·25 전쟁 전후한 시기에 전국적으로 자행된 양민 학살을 조사하기 위하여 특별 조사반을 구성하였다. 이 특별반의 경북반은 주병환(朱秉煥)·윤용구(尹鎔球) 등 두 명의 국회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1960년 6월 2일부터 6월 6일까지 달성군 가창면과 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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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달성 지역의 역사. 달성 지역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대구 월성동 유적(月城洞遺蹟)을 통해 후기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달성군의 역사는 대체로 대구의 역사와 함께 살펴보아야 하며, 대구에서 분리되었던 시기[1914~1995년]는 독립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대구는 예로부터 달구벌(達句伐), 달구불[達句火], 달성(達城) 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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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학생 독립운동가. 염필수(廉弼洙)[1914~?]는 1920년대 대구 계성 학교에 입학한 뒤 동맹 휴학에 연루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1929년 4월 일본 교토도시샤 중학[同志社中學] 4학년에 편입학하였다. 1931년 6월 무렵 대구 지역 중등 학교가 참여한 사회 과학 연구회에 가담하였다. 사회 과학 연구회의 조직은 제1,2그룹을 두고, 제1그룹은 김석구(金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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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학선(吳學善)[1925∼2010]은 1925년 7월 20일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강림리 599번지에서 태어났다. 1944년 6월 중국 상해(上海) 주둔 일본 해군 육전대(日本海軍陸戰隊) 사령부에서 근무하였다. 그때 광복군 지하 공작원 김만득(金萬得)과 연락하며 활동하다가 이 사실이 탄로되어 일본군의 미행을 받게 되자 부대를 탈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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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우동진(禹東進)[?~?]은 경상북도 달성군 월배면 상인동[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서 태어났다. 1913년 음력 정월대보름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 안일암에서 시회를 가장하여 결성된 재건 달성 친목회[조선 국권 회복단 중앙 총회]에 관계하였다. 달성군 월배면 상인동의 윤상태(尹相泰)와 우하교(禹夏敎)의 권유를 받고 달성 친목회에 가입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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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이견(利見), 호는 백산(白山). 역동(易東) 우탁(禹卓)의 21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우홍철(禹弘哲), 할아버지는 우병도(禹秉圖)이다. 아버지는 우방희(禹邦熙), 어머니는 진양 강씨 강치용(姜致龍)의 딸이다. 아버지는 우방희(禹邦熙)는 무과에 합격하여 사과(司果)를 지냈다. 우리견(禹利見)·우경옥(禹景玉)·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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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윤흠(允欽), 호는 노암(魯菴). 증조할아버지는 우이진(禹履鎭), 할아버지는 우해정(禹海鼎)이다. 아버지는 우권동(禹權東), 어머니는 조봉대부(朝奉大夫) 이석린(李錫麟)의 딸 인천 이씨(仁川李氏)이다. 우하교(禹夏敎)[1872~1941]는 1872년 5월 1일 경상북도 달성군 월배면 상인동에서 태어났다. 19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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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자는 성민(聖玟) 또는 성천(聖天), 호는 향산(香山). 아명은 주경(周經)이다. 윤상우(尹相佑)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윤필은(尹弼殷)이며, 작은 아버지는 윤상은(尹相殷)이다. 윤상태(尹相泰)[1882~1942]는 1882년 9월 30일 경상북도 달성군 월배면 상인동에서 태어났다. 1905년 1월 거제(巨濟) 군수에 배명되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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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달성군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병. 한말의 의병(義兵)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맞아 한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봉기한 민병(民兵)이었다. 민병이라고 해도 관군을 지원하는 등의 단순한 민병이나 관군의 위치를 초월한 민족의 군대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관군과 함께 또는 관군의 보조적 위치에서 작전을 수행한 조선 시대의 의병과 다른 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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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이 일제의 주요 인물의 암살과 건물 파괴를 단행하는 방법으로 조선의 독립을 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 의열단은 일제의 주요 인물의 암살과 건물 파괴를 단행하는 방법으로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였다. 조선 총독부, 동양 척식 주식회사, 매일 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중요 기관 등 일제의 식민지 통치 기관 및 그 관련 기관의 시설에 대한 폭파를 목적으로 하였다. 이러한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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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05년 대구 사립 협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만주와 국내에서 조선노동공제회, 신간회 운동 등 비타협적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군선(君善), 군미(君美), 호는 지오(池吾). 아버지는 이병두(李柄斗)이다. 이경희(李慶熙)[1880~1949]는 1880년 6월 11일 경상북도 달성군 성북면 서변리에서 태어났다.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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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기양(李起陽)[?~?]의 호는 나봉(那峯)이다. 1920년대 이종암(李鍾岩)[양건호] 사건이 발생할 즈음 이종암의 알선으로 의열 단원(義烈團員) 배중세(裵重世)를 자신의 별장에 숨겨 주었다. 그 뒤 배중세는 의열단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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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의(全義). 아버지는 이근영(李根泳)이다. 이봉로(李鳳魯)[1902~1940]는 1916년 서울중동 중학을 졸업하고, 서울 영어 학원을 수료하였다. 1924년 4월 중국 북경(北京)의 서성 공업 대학에 유학하였다. 1925년 김창숙(金昌淑)이 이회영(李會榮)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논의한 뒤 장기적인 관점에서 영남 유림을 대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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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의(全義). 아버지는 이근영(李根泳)이다. 이용로(李龍魯)[1897~?]는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 하산동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 중 도쿄[東京]에서 3·1 운동을 경험하였다. 그 직후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임시 정부 수립이 추진되었다. 임시 정부 수립에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였다. 1919년 6월 동아 예비 학교(東亞豫備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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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명곡리에서 태어난 이현수(李賢壽)[1896~?]는 1917년 9월 무렵 독립을 위해 국외로 망명하였다. 중국의 상해, 광동(廣東), 홍콩 등지로 다니다가 1919년 3월 모친이 사망하자 귀국하였다. 모친상을 치르고 임시 정부 수립 소식을 듣고 다시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그는 상해 임시 정부의 재무부 서기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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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현준(李賢俊)[1902~?]은 중국 유학중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에 가입하여 황옥폭탄사건에 연루되었다. 한영근(韓英根)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이현준(李賢俊)[1902~?]은 1902년 2월 20일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에서 태어났다. 1922년 중국 베이징의 노하 중학(潞河中學) 4학년에 재학하고 있던 중 조선 독립 달성을 목적으로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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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2월 8일 김종철(金鍾喆)이 일본 경찰 가이[甲斐]를 살해하고 탈출한 사건. 일제 강점기 국외에서는 독립 전쟁론에 입각한 무장 항일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를 적절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자금과 독립운동가의 확보가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에 따라 독립운동 자금 마련 운동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1920년 9월 송두환(宋斗煥)은 김종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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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였던 시기 달성군의 역사. 1910년(순종 4) 일제의 강제 병합으로 통감부가 총독부로 바뀌었다. 조선 총독부는 총무·내무·탁지·농상공의 행정 부처와 사법부를 두고, 지방은 도(道)·부(府)·군(郡)·면(面)의 행정 체계를 갖추었으며, 총독은 일본 천황에 직속되어 총리대신을 거쳐 천황에 상주할 수 있는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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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달성군의 주요 농업 생산물. 일제강점기 달성군의 주요 농업 생산물은 보리·쌀·콩 등이었다. 1928년의 통계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먼저, 달성군의 최대 작물인 보리의 경우 재배 면적 164.66㎢에 수확고는 14만 900석이었다. 이는 쌀 재배 면적의 두 배, 쌀 수확고의 두 배 이상이었다. 두 번째 생산 작물인 쌀의 경우 재배 면적은 약 79.34㎢에 수확고는 6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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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달성군에서 수리 사업을 목적으로 설립 운영된 조합. 수리조합(水利組合)은 1906년에 제정된 수리조합 조례에 따라 관개 배수 시설의 신설 및 보수와 관리를 목적으로 설치된 조합이다. 수리조합의 설치는 1920년대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한 일제가 그 원활한 성공을 위해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이었고, 달성군에서는 수성 수리조합(壽城水利組合)·동부 수리조합(東部水利組合)·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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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달성군에서 전개된 농민 운동. 달성군은 1914년 조선 총독부의 지방 제도 개편 때 전통적인 대구에서 분리되어 대구부를 둘러싼 드넓은 농촌이었다. 따라서 달성군의 주요 산업은 자연스레 농업이었다. 일제는 1910년대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근대적 토지 소유를 확립하고, 식민지 지주제를 성립시켰으며, 이에 기초해 농업·농민에 대한 계통적 지배 체제를 수립해 나갔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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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언론인. 송기찬(宋箕贊)[1899?~?]은 달성군 현풍면[현 현풍읍]의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송정덕(宋貞德)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학력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 스스로 밝혔듯이 초등학교도 4년밖에 다니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국외 독립운동, 언론·사회 운동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기자로 활동한 송기찬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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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친일 관료. 본관은 영일(延日). 일본식 이름은 오천교원(烏川僑源)이다. 정교원(鄭僑源)[1887~?]은 1887년 4월 24일 경상북도 달성군 서면[현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1910년 조선 총독부 임시 토지 조사국 서기를 지냈다. 1917년 12월 경상남도 거창군 군수가 되었으며, 1921년 2월 조선 총독부 도이사관에 임명되었다.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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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김창숙(金昌淑)을 중심으로 일어난 독립운동 자금 마련 운동. 1925년 중국 북경(北京)에서 김창숙이 이회영(李會榮)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에 관해 논의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이들은 즉각적인 독립 전쟁은 어려우니 장기적인 독립 전쟁 전략을 구상키로 하였다. 일본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열하(熱河)나, 찰합이(察哈爾) 등의 황무지를 구입,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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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상해 임시 정부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서 시작된 이용로, 이봉로 형제의 독립운동은 제2차 유림단 사건으로 확대되었고, 해방 후 친일 반민족 행위를 청산하기 위한 반민 특위 활동을 거쳐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 활동으로 이어져 한국 근현대사의 맥을 이루었다. 이용로(李龍魯)[1897~?]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달성군 하빈면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 중 도쿄[東京]에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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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10일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치러진 초대 국회 의원 선거. 1947년 11월 14일 유엔은 인구 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한 이래 1948년 1월 유엔 한국 위원회가 남한에 들어왔고, 2월 26일 유엔 소총회에서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한다고 결정하였다. 유엔은 1948년 5월 10일에 치러질 국회 의원 선거를 앞두고 3월부터 준비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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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대구 달성 지역에서 조선건국동맹의 달성군위원회로 조직된 비밀 결사. 1944년 일제의 패전을 예상하여 건국을 준비하기 위해 조선건국동맹이 비밀 결사로 결성되었다. 대구 달성 지역에서는 이구형(李求炯) 등을 중심으로 조선건국동맹의 지방 조직인 달성군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조선건국동맹의 목적과 건국 강령을 수용하여 일제 타도를 위한 동지 규합과 건국 준비 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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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광복 직후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달성군 지역 위원회. 1945년 8월 광복과 함께 조직된 최초의 건국 준비 단체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지부로서 1944년 8월에 비밀리에 조직된 조선 건국 동맹 달성군위원회를 모체로 결성되었다. 1945년 8월 광복과 함께 달성군에 조직된 최초의 건국 준비 단체로서 질서 유지와 치안 확보 등의 활동을 목적으로 하였다. 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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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서 일본인 가도민랑이 설립한 사회사업 단체. 조선부식농원(朝鮮扶植農園)은 농업을 통해 조선 농민의 자활과 독립을 꾀한다는 사회사업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10년 11월 오사카[大阪] 범애 부식회의 창설자인 가도민랑(加島敏郞)이 조선 총독부 및 동양 척식 주식회사의 후원을 얻어 당시 경상북도 달성군 해안면 검사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검사동]에서 개원하였다.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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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은석(趙銀石)[1906~1956]은 1906년 6월 20일 경상북도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서 태어났다. 1926년 6·10 만세 운동 이후 대구 고등 보통 학교 학생들이 사회 과학 서클을 결성하기 위한 움직임 끝에 신간회 대구 지회 회원으로 구성된 강사들의 지도로 사상 강좌회를 비밀리에 개최하였다. 1927년 12월 사상 강좌회 학생들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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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활동한 법조인이자 정치인. 본관은 창녕(昌寧). 호(號)는 일운(逸雲)이다. 조재천(曺在千)[1912~1970]은 1931년 광주에서 공립 중학교를 졸업하고, 1933년 3월 대구 사범 학교 강습과를 수료하였다. 그 뒤 전라북도청하(靑蝦) 공립 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여, 1937년 4월 전라북도남원 공립 보통학교에서 퇴직하였다. 전라북도 산업부 농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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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푸우쑹[撫松縣]에서 조직된 지린성 군정서 부속 기관인 흥업단의 군자금 모집 사건. 흥업단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즈음 중국 푸쑹[撫松]에서 조직된 지린성 군정서 부속 기관이었다. 흥업사에 전라남도 장성 출신의 이만준(李萬俊)이 가입하여 회계 서기로 활동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이후 5월 말까지 경상북도 달성군 무태 출신 이시영(李始榮), 전라북도 익산 출신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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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친일 경제인. 진희규(秦喜葵)[1878~1959]는 한 일 병합 이후인 1911년부터 1920년까지 경상북도 참사(參事)로 복무하였다. 그 사이 1915년 10월 일본 적십자사 특별 사원으로 활동하였다. 1915년 10월 대구부에 자신의 토지를 도로 부지로 기부하여 목배 1개를 받았다. 1918년 대구 은행에 자본을 투자하고 감사역이 되었다. 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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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인천(仁川). 호(號) 석우(石友). 아버지는 채성원(蔡星源), 어머니는 서남주(徐南珠)이다. 채충식(蔡忠植)[1892~1980]은 1892년 음력 11월 15일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에서 태어났다. 1923년에 왜관 청년회가 설치한 여자 야학의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즈음 그는 『조선 일보』왜관 지국장으로 언론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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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서 일어났던 청년들의 사회 운동. 일제 강점기 민족 운동에서 청년 운동은 민족 독립을 위한 새로운 이념의 수용과 전파의 주체로서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1920년대 초반의 청년 운동은 근대 문명의 수용과 전파를 통해 청년층의 자각을 일깨우면서 문화 운동을 펼쳤다. 1920년대 중반의 청년 운동은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청년층의 계급적 인식을 부각시키며 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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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의 대한민국 정치인. 최일(崔一)은 1960년 5월 사회 대중당에 입당하여 경북도당 선전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사회 대중당은 4·19 혁명 직후에 구 진보당계, 민주 혁신당계, 민족 자주 연맹, 민주 사회당계 등의 혁신 계열이 결집하여 만든 정당이었다. 1960년 6월 사회 대중당 공천으로 제3대 경상북도 도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하였다. 1961년 3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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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유림단의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보낸 독립 청원 운동. 3·1 운동의 전국적 확산과 1919년 2월 친일 세력과 경성의 일부 친일 유림이 야합하여 합방 절대 지지 한일 불리 청원서(合邦絶對支持韓日不離請願書)를 일왕에게 보내려던 음모가 폭로되면서 유림의 독립 청원 운동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달성군에서도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제출한 독립 청원 운동이 독자적으로 진행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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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해안면에서 결성된 소작인 농민 운동 단체. 해안소작조합은 1923년 내지 1924년에 결성되어 1925년 지세 반환 운동과 지세 불납 운동을 벌이고 1925년 낙작인회 투쟁을 통해 농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달성군 해안면 소작인들의 권익 옹호와 신장을 목표로 결성되었다. 구체적으로 지세 등 일체 공과금 불납, 소작료 반분, 소작료 운반 왕복 30리, 무상 노동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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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에 있었던 행려병자를 위한 시설. 대구부는 1914년 4월 행려병자(行旅病者)[나그네로 떠돌아다니다가 병을 얻은 자]를 수용할 시설로 행려병인 구호사(行旅病人救護舍)를 설치하였다. 치료가 필요하나 주소가 불명확하여 가족의 소재를 알 수 없는 환자들을 위하여 건립된 구호 시설이었다. 행려병인 구호사는 대구부 예산으로 운영되었으며, 촉탁의 1명, 간호인 2명이 근무하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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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경상북도 현풍군에서 설립되어 활동한 국채 보상 운동 단체. 1907년 1월 대구의 대동 광문회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발기된 이래 당시 경상북도 현풍군[현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도 국채 보상 운동을 위해 단연보상회가 설립되어 활동하였다. 1907년 1월 대동 광문회가 국채 1,300환을 갚아 국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채 보상 운동을 발기하자 현풍군에서도 김진극과 김오발이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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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대구 달성 지역에서 설립되어 활동한 소년 운동 단체. 1925년에 현풍소년회가 창립된 것으로 보이며, 1925년 소년 웅변대회를 개최하는 등 소년의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현풍소년회는 소년들의 사회적 보호와 소년들의 권익 옹호를 목적으로 하여 설립되었다. 1925년 9월 소년 웅변대회를 개최하는 등 강연회, 토론회 등을 주요 사업으로 설정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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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현풍 지역의 청년 운동 단체. 1930년 5월 현풍 청년회가 현풍 청년 동맹으로 조직체를 변경하여 청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현풍청년동맹은 달성 청년 동맹 결성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문화 운동에서 사회 운동으로 전환해 나가고자 하였다. 현풍 청년회가 현풍청년동맹으로 조직체를 변경하여 결성되었다. 현풍청년동맹은 1930년 8월 7일에 정기 총회를 개최하여 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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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8월 달성군 현풍면[현 현풍읍]에서 결성된 청년 운동 단체. 현풍청년회는 풍기 개량과 노동 야학 운영 등을 중심으로 실력 양성론에 입각해 활동하였다. 현풍청년회는 청년들의 풍기 개량과 회관 건립, 그리고 노동 야학 개설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25년 10월 25일 대구 청년 회관에서 열린 달성군 청년 연맹의 가맹단체가 되었다. 현풍청년회는 1920년 8월 3일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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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 개항기 신분이 해체되는 가운데 1894년 농민 전쟁에서 농민군은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려 했고, 이것이 갑오개혁에 반영되어 신분제의 법적 철폐로 이어졌다. 그러나 사회 관습으로는 여전히 신분 차별이 지속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도 백정의 자제에 대해 학교 입학을 제한한다든가 해서 기회의 균등은 박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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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달성군 가창면에서 양민 학살을 자행한 육군 본부 정보국 산하 대북 침투 특수 부대. 호림 부대는 1949년 2월 25일 육군 본부 정보국 산하에 대북 침투 특수 부대로 창설되어 달성군 가창면에서 양민 수십 명을 학살한 것으로 1960년 국회 특별 조사반의 조사에서 규명되었다. 호림 부대는 대북 침투를 위해 창설된 특수 부대이며, 지리산 지구, 팔동산 지구 등에서 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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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화원면에서 결성된 소작인 농민 운동 단체. 화원소작조합은 1923년 내지 1924년에 결성되어 1924년 추수 태업 투쟁과 1925년 낙작인회 투쟁을 통해 농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화원면 소작인들의 권익 옹호와 신장을 목표로 결성되었다. 구체적으로 지세 등 일체 공과금 불납, 소작료 반분, 소작료 운반 왕복 30리, 무상 노동 불응 등이 목표였다. 1923년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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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역 전염병 환자의 치료를 위하여 설립되었던 전문 병원. 대한 제국 때 조선인 전염병 환자는 동인 병원에 수용하고, 일본인 전염병 환자는 대구민단 설립의 전염병 전용 병사에 수용하였다. 그러다 1914년 대구부제 실시와 함께 대구부 남산동에 전염병사를 설립한 이래, 부비(府費)로 유지하여 왔으나 건물이 작고 좁아, 1921년에 부비 5만 원의 예산으로 신축 공사에 들어가, 1...